AI 시대의 디자이너, AI가 디자이너의 자리를 대신할 때 필요한 것

AI가 화면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뽑고, 회의록까지 정리해 주는 시대입니다.
요즘 디자이너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그럼 디자이너는 이제 무엇을 하느냐"일 것입니다. 저희도 공공기관과 기업의 담당자분들께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AI로 아이디어를 뽑으면 되는데, 굳이 사람을 모아 워크숍을 해야 하나요?"
이 글에서는 최근 발표된 리포트와 연구를 근거로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정리하고, AI가 보급된 뒤 조직내 디자인 작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디자이너에게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리포트가 말하는 변화 - 만드는 일은 줄고, 판단하는 일은 늘어난다
디자인 도구 회사 Figma가 사용자 2,500명을 조사한 「2025 AI Report」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 줍니다. 디자이너의 78%는 AI가 업무 효율을 크게 높인다고 답했지만, 자산 구축 같은 핵심 디자인 작업에 AI를 쓰는 디자이너는 31%에 그쳤고, AI 결과물을 믿고 쓸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은 32%뿐이었습니다. 효율은 올라갔지만 신뢰와 핵심 작업 활용은 아직 낮다는 것입니다.
디자이너 900여 명을 조사한 Designer Fund와 Foundation Capital의 「AI in Design Report 2026」은 역할 자체의 변화를 짚습니다. 디자이너가 기획자(PM)와 개발자의 일을 겸하고 그 반대도 일어나면서 직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고, 채용 담당자는 AI 활용 능력과 함께 높은 수준의 완성도, 비전, 스토리텔링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보고서가 우려하는 두 가지 문제입니다. 손기술이 퇴화하는 것(craft atrophy)과, 동료 대신 AI와 함께 일하면서 생기는 고립입니다.
사용자경험 연구기관 닐슨노먼그룹(NN/g)은 「State of UX 2026」에서 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화면(UI)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므로, 디자이너는 사용자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해결하는 쪽으로 "더 깊이 디자인해야(design deeper)"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기관의 「The Return of the UX Generalist」는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역량으로 비판적 사고,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 회의·워크숍의 진행을 설계하고 이끄는 기술), 전략적 의사결정, 모호함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을 꼽았습니다.

정리하면 리포트들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면을 그리고 시안을 만들어내는 '생산'의 비중은 줄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의하고, 여러 사람의 지식을 모으고, 결과를 판단하는 '조율과 판단'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AI가 만드는 문제 영역들
AI가 생산을 맡으면 기업의 디자인 작업은 그냥 빨라지기만 할까요. 최근 연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AI가 디자인 업무를 위임받으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첫째, 결과물이 서로 비슷해집니다.
Doshi와 Hauser(2024)가 「Science Advances」에 발표한 실험에서, 글쓴이 300명에게 AI가 만든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개인의 이야기는 더 참신하고(novelty 최대 8.1% 상승)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특히 창의성이 낮은 편이었던 사람일수록 효과가 컸습니다. 그러나 AI 아이디어를 쓴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로 10.7% 더 비슷해졌습니다. 개인은 좋아지는데 집단 전체의 다양성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Anderson 등(2024)의 실험에서도 ChatGPT를 쓴 참가자들은 아이디어를 더 많이, 더 자세히 냈지만 참가자들 사이의 아이디어는 서로 덜 구별되었습니다. 국내에서도 Lee와 Koo(2024, 홍익대)가 공동디자인 워크숍 실험에서 ChatGPT를 활용한 워크숍은 아이디어의 유창성(개수)이 3.6에서 4로 늘었지만 독창성은 3.8에서 2.6으로 떨어졌고, 참가자들은 아이디어를 모아 결정하는 수렴 단계에서는 ChatGPT보다 직접 논의를 선호했습니다. 다만 이 국내 연구는 참가자 5명의 소규모 실험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둘째, 주인의식이 약해집니다.
헝가리의 서비스디자이너 Barna(2026)가 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 10명을 인터뷰해 정리한 워킹페이퍼는 워크숍 현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주인의식의 약화'를 꼽았습니다. 아이디어가 기계에서 나왔다고 느끼는 순간, 참가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후속 개발의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디어를 자기 말로 다시 써도 애착은 약하게 남았다고 합니다.
Anderson 등(2024)의 실험에서도 ChatGPT 사용자는 자신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 책임감을 덜 느꼈습니다. 조직에서 아이디어가 실행까지 가려면 "이건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감각이 필요한데, AI가 그 감각을 조용히 빼앗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AI는 기록된 것만 학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록되지 않은 지식들이 많다는 겁니다. Trischler 등(2018, 2019)은 사용자의 경험과 잠재된 요구를 'sticky' 지식이라 부르며, 인터뷰나 설문 같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말로 꺼내지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북유럽 기업의 연구개발 워크숍을 분석한 Kronqvist와 Salmi(2011)도 현장 경험의 상당 부분이 실천 속에 묻힌 암묵지(tacit knowledge, 알고는 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식)라서 인터뷰로 잘 옮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로도 안 나오는 지식이 문서에 있을 리 없고, 문서에 없는 지식을 AI가 알 리 없습니다.
저희가 지난 글에서 소개한 '재활용 동네마당' 워크숍을 떠올려 보면 이 빈틈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학교 인근에 설치해 아이들의 배움터로 만들자는 제안은 동네 통장님들만 던질 수 있는 관점이었고, 가정에서 세분화해 분류해도 처리장에서 다시 2차 선별을 거친다는 정보는 폐기물 처리 전문가의 현장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둘 다 보고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던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리포트가 말하는 '조율과 판단'의 역할과, 연구에서 언급되는 문제들을 종합하면 디자이너가 새로 맡아야할 역할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기록되지 않은 지식을 꺼내고, 서로 다른 관점이 퇴색되지 않게 보호하고, 결과를 참여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마지막 판단을 사람의 역할로 남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공동디자인(Co-design, 사용자·현장 담당자·전문가가 디자이너와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만드는 접근) 워크숍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디자인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입니다. 저희가 보기에 이 역할은 네 가지 역량으로 나뉩니다.
첫째, 말로 꺼내지지 않는 지식을 꺼내는 도구를 설계하는 역량입니다.
Sanders와 Stappers(2014)는 '만들기(make)'가 이미 정해진 생각에 형태를 입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관한 지식과 통찰을 끌어내는 핵심 활동이라고 설명합니다. Trischler 등(2018)은 색종이·스티커·연필 같은 단순한 만들기 도구만으로도 참가자가 미래의 사용 상황을 탐색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재활용 동네마당 워크숍에서 사용자 흐름을 시각화하고 아이디어를 포스트잇으로 붙여 연결하게 한 것이 바로 이 도구 설계였습니다. AI가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다면,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아직 데이터가 되지 않은 것을 꺼내는 도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발산과 수렴적 사고를 이해하고 AI의 자리를 정하는 역량입니다.
Barna(2026)는 AI를 발상에 쓴다면 참가자들이 먼저 자기 아이디어를 낸 뒤 발산 라운드의 끝에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는가"를 묻는 용도로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권합니다. 최종 표현·개념화·묶기(clustering)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본 Lee와 Koo(2024, 홍익대)의 국내 실험에서도 발산시 AI가 도움이 되지만 수렴은 직접 논의가 낫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한 점이 눈에 띕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두 연구가 같은 방식을 권한 셈입니다. 이를 협업에서 구현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일이 될 것 입니다.
셋째, 주인의식과 결정의 투명성을 지키는 역량입니다.
Barna(2026)가 제안한 실무 규칙은 단순합니다. AI가 기여한 부분을 참가자에게 밝히고, AI가 형성한 안건그룹은 '제안'으로만 다루며, 순위나 추천에는 사람의 근거를 붙이고, 마무리에서는 AI의 제안·팀의 수정·최종 결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Trischler 등(2018)이 공동디자인 팀의 아이디어가 내부 전문가 팀보다 높은 평가를 받되 팀이 응집력 있게 협력할 때만 그렇다고 한 것처럼, 결과의 품질은 참가자가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느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특히나 조직에서 실행을 전제로 할 경우 더욱)
넷째, 집단의 다양성을 지키며 판단하는 역량입니다.
Sanders와 Stappers(2008)가 말한 집단 창의성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지식이 만나면서 생깁니다. 그런데 앞서 본 연구들은 AI가 개인의 결과물은 좋게 만들면서 집단의 다양성은 줄인다고 경고합니다. 디자이너의 퍼실리테이터 역할은 외부화(externalization, 생각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꺼내 놓는 것) 방식을 설계해 소수의 목소리와 AI의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Barna(2026)의 표현대로 "의미 형성과 추론은 여전히 사람의 책임"이며, 그 책임을 여러 사람에게 고르게 배분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판단 역량입니다.
AI는 평균을 맞춰 줄 뿐, 최적을 만들지는 못한다.
Barna(2026)는 초보 디자이너가 워크숍 준비 단계에서 AI를 신중히 쓰면 워크숍에서 중간 수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서도, "AI는 천장을 올려 주지 않는다"고 못 박습니다. 현장에서 분위기를 읽고, 공감하고, 갈등을 다루는 능력은 여전히 사람의 것이며, AI는 그것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실무자들은 진행 중에 AI를 쓰면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대화의 흐름과 집중을 끊는다고 답했습니다.
반대로 디자이너가 퍼실리테이션 역량이 없는 상태에서 워크숍을 열면 어떻게 될까요. 디자인 퍼실리테이션 문헌을 종합한 Mosely 등(2021)은 많은 비디자이너가 대중 매체 및 문헌에 의존해 디자인씽킹을 이해한 채 디자인 퍼실리테이션을 잘못 실천하고 있으며, 이를 제대로 하려면 디자인 전문성과 경험,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AI가 워크숍 계획서를 대신 써 주는 시대일수록, 그 계획서를 현장에서 살아 있는 과정으로 만드는 훈련된 사람의 가치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함께 만드는 일은 사람의 일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더 빨리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을 결과물에 반영되도록 설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리포트들이 창의적 사고와 퍼실리테이션, 판단력을 남는 역량으로 꼽는 이유도, 연구들이 다양성·주인의식·검증이라는 문제영역을 경고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희 코크리에이션이 공공분야 서비스와 기업의 문제해결 현장에서 공동디자인 워크숍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AI가 보고서에 있는 것을 정리해 줄 때, 보고서에 없는 것을 꺼내고, 그것을 참여자 자신의 답으로 만드는 일은 아직,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사람이 함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글 | 김민수
인용한 연구 중 일부(Barna 2026, Lee & Koo 2024, Jiang 등 2025)는 소규모 표본의 탐색적 연구이므로 결론은 "선행 연구가 시사한다"는 수준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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